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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5-08 15: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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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의원에 도전했으나, 공천을 받지 못한 경안천시민연대 강천심(55) 대표가 경선도 치르지 못하고 자유한국당 공천에서 배제된 것에 대해 크게 반발하면서도 “ ‘광주시의 미래’를 위한 활동은 변치 않고 지속하겠다”고 말했다.

강천심 대표는 오는 6월 13일 치러지는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다선거구(초월·곤지암·도척) 광주시의원으로 출사표를 던진 바 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경기도당이 지난달 20일 단수 추천하면서 도전 의지가 꺾인 상태다.

강 대표는 8일 오전 10시 30분, 광주시청 3층 행정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제가 그간 무슨 일을 했는지 궁금해 하셨던 분들께 지난 30여년의 활동들을 알리고자 이 자리에 섰다”면서 중앙정부의 각종 규제와 정책을 완화시키기 위해 벌인 투쟁을 소개했다.

강 대표는 “팔당상수원으로 인한 중첩규제 속에서 1998년 더욱더 강화된규제(한강법) 정책에 맞선 대정부투쟁으로 부터였다”며 “수질정책개발과 수질개선사업, 예산확보, 불합리한 규제개선에 총력을 기울이는 과정의 시간들이 결코 만만치 않았지만, 광주시의 인구유입과 기업인들이 기업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고, 계획적인 개발과 기반시설을 갖추게 될 수 있어 광주의 발전과 시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것에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만족하고 혼자만의 뿌듯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특별대책지역 수질보전정책협의회 운영본부장도 맡고 있는 강 대표는 "환경부, 경기도, 팔당상수원 주변 7개 시·군 지자체 및 시의회,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수질정책을 개발하고, 불합리한 규제를 협의하는 거버넌스 기구인 ‘특별대책지역 수질보전정책협의회’를 만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면서 “광주군의 시 승격을 비롯해 곤지암리조트가 들어서고 광주시 신청사가 지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미력하나마 숨은 조력자 역할을 미친 듯이 해왔다”고 강조했다.

강 대표는 “시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직 끝내지 못한 역할을 다하고자 했지만 끝내 공천에서 배제되는 상황이 됐다”며 “앞으로도 광주시의 발전과 광주시민들을 위한 일에는 최선을 다해 나가겠지만, 공천에 배제된 이유에 대해서는 꼭 알고 싶다”고 덧붙였다.



기 자 회 견 문

이번 6·13 지방선거 자유한국당 광주시을 다 선거구 시의원 예비후보였던 강천심입니다.

제도권 안에서 시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좋았겠지만 공천이라는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

이번 공천결과에 대해서는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단지 공천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지난 30여년 동안 광주시와 시민들을 위해 헌신해 온 시간을 부정 받았기 때문입니다.

공천결과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승복합니다. 하지만 경선도 아닌 단수추천이 된 이유와 결과에 대해서 만큼은 자유한국당의 성의 있는 답변을 요구합니다.

저는 오늘 시민 여러분께 광주시를 위해 지난 30여년 동안 이어 온 활동들을 알리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지난 30여년 동안 광주시의 숨은 조력자로 살아 왔습니다. 젊은 청춘을 광주시와 시민들을 위해 헌신해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광주시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중첩규제를 받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러한 규제의 시초는 지난 1973년 전력수급을 목적으로 건설된 팔당댐입니다. 댐 건설 2년 후인 1975년 정부는 팔당호 주변을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하고 1990년에는 특별대책지역으로 지정했습니다.

이러한 정부 정책으로 재산권 행사는 물론 계획적인 개발마저도 제한을 받으며 주민들의 삶의 질은 피폐해져 가기 시작합니다.

1989년 수질개선이라는 명분 아래 주민들은 100평짜리 창고도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수십만평에 달하는 5개의 골프장 건설이 승인됐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불합리한 규제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고 이때부터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전문지식 또한 부족했지만 불합리한 규제는 반드시 뜯어 고쳐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골프장 승인취소는 못했지만 피해 최소화와 피해보상을 이끌어 냈습니다.

이후 1998년 한강법이 입법예고 됐습니다. 이전의 규제와는 확연히 다른 강력한 규제였습니다. 또 다시 수질개선이라는 미명 아래 25년을 중첩규제로 옭아 메고 이 땅을 떠나지 않고는 살수 없을 만큼 규제의 장벽을 쌓았습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갈 곳도 없었습니다. 어떠한 규제에도 단 한번 저항하지 못했던 우리는 살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뜨거운 태양도, 살을 베는 추위도,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지고 물대포를 맞아도 집시법위반 벌금을 물려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땅 한 평도 없는 저였지만 생업을 포기한 채 저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 결과 환경부와의 협의가 시작됐고 결코 쉽지 않은 협상이었지만 우리의 현실을 대변해 왔습니다.

이후에도 규제 개선을 위해 중앙정부 공무원들을 만나 설득하고 전문가들을 찾아 다니며 조언을 구했습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일은 저의 인생이 됐습니다.
오염총량관리제도(임의제)와 주민지원사업비, 오·우수분리관거사업, 하수처리장 신·증설, 처리장 운영비, 하수 물량을 확보해 계획개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곤지암리조트, 광주시 신청사, 동원대학 시설동, 공동주택 등 하수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총력을 다 했습니다. 이런 합의 과정은 사생결단의 자세로 결코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습니다. 당시 박종진 군수님은 지방자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인구유입 정책을 펼치던 때였습니다.

매년 규제도 강화됐습니다. 환경정책기본법, 수도권정비계획법, 특별대책고시개정, 투기지역지정, 토지거래허가제 등 하루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고 투쟁역시 계속됐습니다. 당시, 저는 경기연합수석대표로 7개 시·군 시장군수, 시·군 의회 의장, 환경부 장·차관 및 관계 공무원들과 거의 매일 만나고 투쟁하면서 협의를 통해 100% 만족한 수준은 아니지만 규제완화를 이끌어 왔습니다. 자연보전권내 공장증설(빙그레) 등 기업인들이 기업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매번 상황이 생길 때마다 투쟁을 하기에 모든 면에서 지치고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환경부, 경기도, 경기도 7개시·군 지자체 및 시의회,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수질정책을 개발하고 불합리한 규제를 협의하는 거버넌스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특별대책지역 수질보전정책협의회입니다.

그 후, 15년의 시간이 지났고 수질개선의 문제와 해결방안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또한 강력한 중첩 규제 속에서 계획적인 개발계획을 이뤄가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일들도 중요하지만, 규제지역 환경과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수질개선의 의무를 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질개선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99년 경안천시민연대를 결성하여 주민 홍보, 교육, 정화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또한 2002년 광주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를 창립, 2006년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님과 경기도, 광주시, 용인시가 함께 경안천살리기운동본부를 창립해 오늘날의 경안천을 만들어 왔습니다. 경기연합대책위원회는 한강지키기운동본부로 전환하는 등 20여년간 수질개선운동에 총력을 다해왔습니다.

1995년 광주인구는 7만8천명에서 현재 40만을 향해가며 지금의 발전은 결코 쉽지 않았던 과정과 끊임없는 희생들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제가하고 있는 분야에서 광주시의 예산확보에 전념했습니다. 팔당댐이 없어져 상수원으로의 기능이 상실되지 않는 한 누군가는 이러한 일들을 끝임 없이 지속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면, 제가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광주시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 공천을 받지 못했고 그런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굴하지 않고 지금까지 제가 걸어왔던 길을 묵묵히 계속 전진해 나가겠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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