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8-02-28 12:19:04
기사수정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  

심리상담연구소 심지 소장 김 이 수 

오래도록 고민을 하다 원고를 쓴다. 온 나라가 한 검사의 용기 있는 성추행 피해 고백으로 들썩이고 있다. 그녀의 긴장한 숨소리를 굳이 직접 목도하지 못했다 해도 그가 고백하는 추행이 낯설지 않은 것은 여자로 살아가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경험하게 되는 일상의 한 단면 안에 그의 경험이 있기 때문일 테다.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지난 상담을 아프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피해자들. 나는 그들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그 초점 없는 눈빛, 사회에 대한 공포가 몸에 스며들어 밤엔 길을 나설 수도, 택시를 탈 수도,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올까 택배를 주문할 수도 없었던 내담자들에게 나는 무어라 말했던가.

그 검사는 상사에게 동료에게 법의 시스템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음에도 그 강한 권력 앞에서는 무력했다고 고백했다. 나의 내담자들 역시 자신이 사는 삶의 테두리 내에서는 홀로 버티는 것 외에는 달리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들은 경찰서를 찾았고 가족들에게 하소연했으나 돌아오는 것은 더 깊은 갈등과 모욕이었고 그것은 또 다른 절망이었다. 십 년이 지났지만 지금이라도 그 경찰서를 불태워버리고 아빠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오직 그 순간에만  분명해졌던 그녀의 눈빛을 난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그만큼 그의 상처는 깊었고 삶의 발걸음은 휘청거렸다.

상담의 많은 부분들은 일상적인 갈등에서 시작되지만 그 깊은 근원에는 늘 ‘성’이 연관되어 있다. 사건이 오래 지난 후에도 부부간의 갈등, 이성 자녀에 대한 알 수 없는 경계심,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많은 부분들은 그들의 지난 시절에 경험한 성적 수치심과 관련이 있다.

아주 찰나에 일어난 일이라 하더라도 성적 수치심은 그의 인생 전반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친다. 그 한 사건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직접적으로 나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가치를 지닌 존재인지가 실제적으로 경험되는 장면이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희롱당하고 만져지고 돌보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구나를 절감하게 한다. 그리고 향후 모든 일상에서 나를 스스로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버린다. 체벌, 성적 학대. 몸이 체험하는 상처는 그래서 치명적이다.

그래서 개학을 앞둔 부모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다. 부디 자녀에게 어떤 말들이 성희롱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경계하도록 교육시켜주시길 부탁드린다. 다행히 시절이 변해 더 이상 피해자들은 참고 견디고 개인의 잘못이라 감내만 하진 않는다. 내 자녀가 경험하는 성적인 학대에 대해 부모들은 매우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으며 어린 학생이고 미디어에 무분별하게 노출된 비정상적인 성적 농담을 따라한 것이라 해도 예외 없이 성희롱, 성추행으로 처벌과 징계의 대상이 된다. 이는 피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자성이 부족했던 가해자에게도 큰 상처가 된다.

만약 성인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은 성에 대해 잘 모를 것이고 순수하게 친구들을 만나며 성인이 돼서야 순결한 사랑을 할 것이라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믿는 부모들이 있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당신의 자녀 세대는 그렇게 무지하지 않으며 왜곡된 정보들을 이미 알고 있고 꽤 적나라한 성적 표현들에 낯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미 유튜브나 다른 매체를 통해 친구들을 통해 많은 정제되지 않은 내용들을 접하고 소통하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성적인 매체들의 과장된 오류들을 공유하고 그대로 흉내 내는 것은 범죄의 소지가 있으며 그러한 표현들을 단순히 따라 하면서 이성친구들을 만지거나 성적인 표현들을 하게 되면 타인에게 평생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처벌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원치 않는 성희롱, 성추행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이런 성적인 희롱과 추행이 매우 중한 범죄가 됨을 분명히 교육할 필요가 있다. 이후에 직장을 가게 되거나 이력을 평가받을 때에도 다른 무엇보다 크게 영향을 받는다. 물론 두말할 나위 없이 어른들의 무분별한 성상품화의 결과이며 원인 제공자들은 성인인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어린 자녀들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

부모님들께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린다. 어떤 행동 어떤 말이 잘못된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를 이해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호소하는 것은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이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남성, 여성, 부하직원, 귀여운 여자 친구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나와 똑같이 소중한, 우리와 오랜 시간 같은 하늘에서 살아갈 꿈이 있고 희망이 있으며 누구보다 존중받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 존재다.

우리는 모두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그저 흥미로 재미로 농담 삼아 그에게 건네는 한 마디. 그의 인생에 삶에 지독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만큼, 나 역시 중요한 사람이다. 성과 관련된 폭력에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 내 앞의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 성과 관련된 교육의 근본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오랜 시간을 원고 앞에서 방황하며 반성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성범죄의 피해자들이 계시다면 다시 한번 꼭 말씀드리고 싶다. 진심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어설프게 침묵하고 미온적으로 대처한 탓이다. 결코 당신의 탓이 아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gjcitizen.com/news/view.php?idx=54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